미발표작/끄적거림 천년의 바람 2020. 10. 6. 17:18
밭에 왔어요. 일을 하고 있죠. 남이 먹을 것을 가꾸는 중입니다. 모기들이 무섭게 달려듭니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사실 난,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들에게 저절로 굴러들어온 싱싱한 먹을거리에 불과합니다.
미발표작/끄적거림 천년의 바람 2020. 10. 6. 17:11
아이들은 콩벌레라 불렀다. 쥐며느리라 이야기 해주고 싶은데 참았다. 쥐며느리라 부르는 이유를 몰랐다. 어디가서 아는 체, 잘난 척하면 안된다.
기발표작/바다 천년의 바람 2020. 9. 14. 14:32
바닷바람이나 쐬면 좋을까 싶었다. 은근 불편할 정도로 몇 주간 허리가 아팠다. 핑계로 주말마다 집 안에만 머물렀던 탓이다. 주말에 오랜만에 부산에서 내려온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2월 중순, 시기로는 겨울 기세가 등등할 때지만 내내 봄 같은 날씨다.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면서 낚시는 비수기다. 작년엔 잦은 비로 농사를 망치더니 올겨울 들어서는 어업에다 타격이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기상이변에 농어민들의 시름이 깊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야 하지만 뜻과는 달리 너무 어긋나 바로잡기는 힘들 듯하다. 아픈 허리로 무슨 낚시냐고 말리는 어머니의 말씀을 귀 뒤로 흘리며 포구로 향했다. 썰물 시간대로 접어드는 바닷물은 포구 선착장 바닥쯤에서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사리물때라 그렇다. 선착장 위에 손을 걸..
기발표작/들메 천년의 바람 2020. 9. 14. 14:19
유난히 긴 장마가 지나고 때늦은 여름 더위가 한창이다. 계절에 맞춰 제 기세를 펼치지 못했던 아쉬움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탓일까, 밤낮 가리지 않고 더위가 맹렬하다. 집에 드나들면서 담벼락을 엉켜 붙들고 산발인 듯 피어있는 능소화를 본다. 꽃 색이 진한 분홍으로 찬란하고 줄줄이 달린 꽃봉오리가 양반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이름처럼 하늘을 향해 도도하다. 이른 장마 때부터 하나둘 꽃봉오리를 내더니 이 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피고 지기가 계속이다. 같은 시기에 첫 꽃을 피웠지만 이미 꽃잎이 떨어지고 잎만 무성한 산수국에 비하면 화려함을 즐기는 양반의 꽃답다. 시골의 한적한 아파트라 눈길 미치는 곳곳에 공터가 있다. 그 공터에는 계절마다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들어차 있다.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이 화단..
기발표작/일상 천년의 바람 2020. 8. 25. 14:44
30년 내 가장 빨리 시작되는 장마라는 예보는 빗나갔다. 이틀, 기세 있게 비를 뿌리더니 금세 불볕더위가 시작됐다. 6월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릴없는 날이다. 4월을 지나면서 겨울 끝 바람은 남풍에 밀려 사라지지만 바다는 겨울 냉기를 쉽게 벗어내지 못한다. 5월 한 달을 서서히 몸을 달구고 나서야 바다도 비로소 봄을 맞는다. 어렵게 맞이한 봄도 잠시, 태평양 멀리 장마전선이 생겨나면서 바다는 이내 궂은 모습으로 바뀐다. 해무가 수시로 피어올라 시야를 가리고 파도는 삼사일이 멀다 하고 높게 출렁인다. 사람은 없을 때 더 나누는 법이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니 자연히 수입이 줄고 덩달아 먹거리가 줄어든다. 모자라면 자기 손안에 더 품을 법도 하지만 바닷가 사람들은 서로 나눈다. 텃밭에 듬성듬성한 배추며 ..
기발표작/일상 천년의 바람 2020. 5. 19. 17:45
작은 아파트에 16년을 살았다. 지난해부터 틈틈이 난간을 확장하자는 아내의 말에 나는 대답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고 세간살이도 늘어나면서 여유 공간이 점점 좁아지긴 했다. 하지만 일 벌이는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에 애써 무시로 일관했었다. 그러던 아내가 결국 일을 저질렀다. 공사 전 세간을 정리하면서 구석구석에서 나온 물건은 어마어마했다. 잘 보관하리라 고이 정리해뒀던 물건이 10년을 넘어서야 나타났다. 필요할 때 쓰자고 잠깐 정리해뒀던 소품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모습을 드러냈다. 장롱, 책장, 침대, 싱크대 등등 수납공간은 말할 나위도 없고 틈새가 있는 곳에 어김없이 들어찬 물건들. 꺼내놓으니 거실에 반이나 들어찼다. 무얼 그리 끌어안고 살았는가 싶었다. 쓰일 데가 있다 하여 남겨두고, 버리..
기발표작/바다 천년의 바람 2019. 12. 25. 16:36
이 글은 중앙종합문예지 시사문단 12월호에 수필부문 신작으로 발표한 글입니다. 날이 너무 좋았다. 며칠 몰아치던 매서운 바람은 나무마다 이파리를 반쯤 훑어놓았다, 헤집어놓은 틈새로 햇살은 거침없이 땅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 사흘 전 내린 비로 곤두박질쳤던 기온도 해가 중천에 오르자 지레 꽁무니를 뺐다. 가을의 끝자락에 뜬금없는 봄 같은 날씨였다, 계절의 축에 기울어진 햇살은 한낮임에도 유리창 서편으로 들이쳤다. 사무실에서 나른함을 쫓던 시간, “청수가 바당에 갔단 빠정 죽었져.” 늘어진 몸을 화들짝 일으킨 건 수화기 넘어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고향 마을에서 어린 시절 내내 어울렸던 두 살 위의 형. 여차저차 사정 들을 겨를 없이 한 시간 거리 포구를 향해 내달렸다. 선..
기발표작/일상 천년의 바람 2019. 12. 25. 16:17
이글은 2019년 10월 중앙종합문예지 시사문단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수필작가로 등단한 글 중 한 편입니다. 어머니다. 바쁘냐? 물질 어장 감시 당번이라 바닷가에 와있다. 바다가 세서 그런지 바닷가에 사람 하나 없네. 그래도 시간은 지켜야 할 거라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중이다. 너희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냐? 내가 아무 말 안 해서 그렇지 둘 생각만 하면 밤에 잠이 안 와. 무슨 일? 이젠 날 아주 바보 멍청이 취급하는구나? 풀긴 뭘 풀어? 너희들 둘이 지금 하는 짓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나? 저번 유월에 동해안 여행 갔을 때, 그래! 시장에서 회 사다가 숙소에서 먹은, 너 새벽까지 술 처마신 날 말이야. 요즘 요놈들이 뭔가 이상하다 해서 둘 사이에 무슨 일 있냐고 물었더니 주절주절 잘도 이야..
기발표작/바다 천년의 바람 2019. 12. 25. 16:07
이글은 2019년 10월 중앙종합문예지 시사문단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수필작가로 등단한 글 중 한 편입니다. 아버지는 조업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채낚기를 주로 하는 작은 배들도 포구에 묶인 지 오래다. 잦은 갈바람 때문인지, 날이 유독 더워서 그런지 바다에 고기가 없는 탓이다. 8월의 서귀포시 막숙포구는 앞바다 가까운 거리의 범섬을 오가는 갯바위 낚시꾼들만 분주하다. 주말이라 어김없이 낚싯대를 챙기고 막숙포구로 향했다. 지난주 헛낚시 탓에 이번에는 고등어 미끼를 준비했다. 흔한 고기인 어랭이와 우럭을 노려볼 생각에서다. 어랭이는 놀래기를 이르는 제주어다. 우럭은 쏨뱅이의 제주어로 이 두 어종은 제주도 해안 가까운 곳에 정착하여 산다. 정착하는 습성으로 사시사철 낚시가 되며 조림이나 매운탕으로 ..
기발표작/바다 천년의 바람 2017. 8. 3. 17:10
"걸었어, 걸었어!" 영배의 경쾌한 외침이 울렸다. 보트로 범섬주변 곳곳을 탐색하며 소득없이 돌아다닌지 한 시간, 들물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동모 앞에 멈췄다. 동모는 범섬 동쪽 끝 바위 코지(곶)를 이름이다. 갯바위에서는 벵에돔, 돌돔, 감성돔들이, 배낚시에서는 가끔 다금바리도 입질을 하는 나름 이름있는 포인트다. 동모는 들물 시기에 파도가 거세다. 들물은 동쪽에서 흘러오다 범섬을 맞닥뜨리고 좌우로 갈라진다. 갈라진 조류는 서쪽으로 곧게 흐르는 들물 조류와 직각으로 만나면서 사나워진다. 한 곳으로만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과 풍파에 부딪히며 방향이 틀어진 사람이 만나면 사단이 나는 그런 이치다. 보트는 사방에서 치받는 파도로 뒤뚱거리며 물길을 따라 빠르게 흘렀다. "커~ 커! 큰 놈이우다" 몇번의 내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