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꽃은 한 번에 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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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긴 장마가 지나고 때늦은 여름 더위가 한창이다. 계절에 맞춰 제 기세를 펼치지 못했던 아쉬움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탓일까, 밤낮 가리지 않고 더위가 맹렬하다. 집에 드나들면서 담벼락을 엉켜 붙들고 산발인 듯 피어있는 능소화를 본다. 꽃 색이 진한 분홍으로 찬란하고 줄줄이 달린 꽃봉오리가 양반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이름처럼 하늘을 향해 도도하다. 이른 장마 때부터 하나둘 꽃봉오리를 내더니 이 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피고 지기가 계속이다. 같은 시기에 첫 꽃을 피웠지만 이미 꽃잎이 떨어지고 잎만 무성한 산수국에 비하면 화려함을 즐기는 양반의 꽃답다.


시골의 한적한 아파트라 눈길 미치는 곳곳에 공터가 있다. 그 공터에는 계절마다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들어차 있다.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이 화단 저 화단에서 피고 지는 들꽃을 보노라면 시골살이도 무료한 일은 아니다.
2월 이른 봄, 정원의 매화와 동백, 목련이 꽃을 떨구고 나면 화단 바닥이며 공터며 가리지 않고 개불알풀꽃, 양지꽃, 개별꽃, 광대나물꽃이 가득 피어오른다. 그 시기를 메꾸던 벚꽃이 눈처럼 내려 들꽃을 덮으면 5월이다. 아파트 경계 휀스에 얽히고설킨 붉은 장미가 꽃잎을 떨구어 마지막 봄 잔치를 끝내면 공터는 산수국꽃 차지다. 산수국이 헛꽃으로 날개 지친 나비와 벌들을 부지런히 불러모으는 사이, 병솔나무꽃, 복사꽃, 모과꽃이 덩달아 피고 아파트 담벼락을 얽은 능소화까지 꽃잎을 열면 그야말로 여름꽃 잔치다. 잔치가 너무 요란했던 탓일까, 가을엔 들국화 몇 그루 간간이 필 뿐 모두 사그라들다 비 서너 번에 겨울 한복판이다. 칼을 품은 제주도의 겨울바람, 몇 겹의 비늘 외투로 꽃잎을 감싸고 동백꽃망울은 겨울바람을 견딘다. 모든 화단 식물이 무채색 쭉정이로 마르고 정원 나무들도 하는 짓이라곤 바람에 앙상한 가지만을 볼썽사납게 흔들어댈 때 동백꽃망울만이 유일한 꽃이다.

 


들풀, 나무할 것 없이 모든 식물은 나름 특성으로 계절에 맞춘 가장 적합한 생활주기를 갖고 있다.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 시기를 달리함으로써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 달콤하고 큼지막한 과육으로 번식을 잇는 과실수와 바람에 씨를 퍼트리는 소나무, 사람이나 동물에 달라붙어 번식하는 도깨비바늘처럼 번식을 위한 최적 시기에 맞춰 생애주기를 설계한다. 그렇기에 씨를 맺기 위해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덕에 우리는 사계절 꽃을 보고 만지며 살아간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를 한라산 서편 등허리로 잇는 천백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7백 미터 고지에 이르러 왼편으로 거린사슴 오름을 만난다. 오름 아래 남쪽으로 승용차 하나 넉넉히 지나갈 만한 시멘트 도로가 나 있다. 예전 목재를 벌채하고 실어나르던 임도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좌우로 햇살을 가리는 원시림이 펼쳐진다. 입구에서 500여 미터를 들어가면 빽빽했던 나무숲이 일시에 숨통이 트이면서 햇살이 곧추 떨어진다. 일대가 너른 풀밭으로 철 따라 온갖 풀꽃이 저마다 색으로 피어난다. 거린사슴 임도는 야생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별유천지 같은 곳이다. 카메라를 둘러매고 야생화 도감 한 권 손에 들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계절마다 줄을 잇는다.


거린사슴 임도는 사계절 중 초봄이 가장 좋다. 예전 자연해설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봄이면 매 주말을 이곳에서 보냈다. 얼음이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하면 노루귀 싹이 사방에서 움트기 시작한다. 싹을 내고 한두 주가 지나면 꽃대를 내고 하나둘 꽃을 피워낸다. 그렇게 시작된 꽃은 수일 내로 너른 풀밭을 채워가고 곧 지천이 꽃밭으로 변한다. 마치 하얀 눈에 파묻힌 겨울인가 착각이 든다. 노루귀는 하얀색 꽃이 대부분이지만 드문드문 분홍노루귀도 함께 피어 꽃 잔치의 감을 더한다. 노루귀는 키가 작은 들풀이다. 잎은 땅바닥에 거의 붙은듯하고 작은 꽃대 하나 세워 꽃을 피워내니 풀밭은 꽃만 가득하다. 이 시기에 꽃피우는 들풀은 모두 키가 작다. 초봄의 대표적인 양지꽃, 별꽃들도 나위 없다.

 


키가 작은 들풀은 자신만의 생존전략을 갖고 있다. 키가 큰 들풀이 채 싹을 틔우기 전에 서둘러 꽃을 맺고 씨를 퍼뜨린다. 완연해진 봄의 기운을 받고 키 큰 들풀이 싹을 내고 키를 키우기 시작하면 생존경쟁에서 밀려난다. 작은 키 탓에 햇빛을 받기 어렵고, 또한 꽃을 피우더라도 수정의 매개체인 나비나 벌의 관심에서 멀어져 번식의 기회가 적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초봄 다른 식물들의 싹을 틔우기 전에 부지런히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전략을 구사한다.

 

온통 풀밭이 하얗다 해도 발 디딜 틈은 있다.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꽃밭을 다니다 보면 노루귀 하나하나 다 다른 모양이다. 키가 다르고 색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 꽃도 다르지 않다. 모두 활짝 핀 듯 보여도 이미 수정을 마치고 꽃잎을 떨구는 개체가 있고 막 한창으로 피어 나비를 유혹하는 개체도 있다. 그 옆으론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는 녀석도 있고 쌀알만 한 크기로 봉오리를 맺는 녀석들도 부지기수다. 물론 만개한 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서로 시간을 두고 꽃을 피운다. 이 또한 식물들의 생존전략이다. 식물들은 전 생애를 자손의 번식을 위해 바친다. 자손의 번식은 꽃을 피우고 수정을 통해 씨를 만들고 퍼트리는 일이 전부다. 이를 위해서는 수정할 수 있는 기간을 최대한 늘려 잡는 게 관건이다. 모두 일시에 꽃을 피우면 갑작스러운 추위나 천재지변, 병충해 혹은 뜻하지 않은 다른 동물들의 습격 등으로 일시에 종의 유명을 달리할 수 있다. 그래서 안전장치로 개체마다 꽃이 피는 시기를 조절한다. 먼저 피어난 꽃이 외부의 영향으로 수정을 못 해도 기다렸던 개체들이 계속해서 꽃을 피워내며 씨를 맺는다. 그렇게 식물은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종족을 번식하고 삶을 이어나간다.

 

 

아들은 올해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머문 채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다. 떨어져 지내는 탓에 한 주를 넘지 않게 전화통화를 하는데 요즘 들어 들리는 목소리에 힘이 부쩍 빠졌다. ‘마음이 힘들구나’ 하는 생각에 제주도 집에 내려와 기운 차리고 가라니 바로 내려왔다. 일정계획이 틀어진다며 한사코 내려오기를 거부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5일을 일정으로 집에 내려왔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나 하고 이제나저제나 눈치를 보다 주어진 날이 다 지났다. 집 떠나기 하루 전, 밤에서야 술기운을 빌어 이야기를 꺼냈다.

 

“네 어릴 때 아빠와 같이 거린사슴에 꽃 보러 갔던 기억을 해보자. 풀밭에 찬지를 벌이던 들꽃 무리, 그 꽃들은 모두 한가지로 한 번에 같이 피었었을까? 아니야, 모든 꽃은 한 번에 피지 않아. 봄에 피는 꽃이 있고 가을에 피는 꽃도 있으며, 추운 겨울바람을 이기고 피는 꽃도 있지. 같은 계절에 피는 꽃이라도 다 같지도 않아. 멀리서 보면 다 같이 피어있는 듯해도 가까이 가보면 다들 제각각이지 않았니? 활짝 핀 꽃이 많았지만, 아직 꽃봉오리로 있는 것, 아예 준비가 안 된 것들도 꽤 있었어. 너도 마찬가지야. 봄꽃을 부러워하지 마. 여름에 나만 못 폈다고 실망하지 마. 너는 가을에 피는 국화일 수도 있고 겨울 추위에 도도히 홀로 피는 수선화일 수도 있어.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아. 다들 나름의 생애와 꽃 피우는 시기가 있어. 우리는 그렇게 다 다른 거야.”

 

아들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나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중앙종합문예지 월간 시사문단 2020년 9월호에 신작으로 발표한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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