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긁어주는 아들

30년 내 가장 빨리 시작되는 장마라는 예보는 빗나갔다. 이틀, 기세 있게 비를 뿌리더니 금세 불볕더위가 시작됐다. 6월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릴없는 날이다. 4월을 지나면서 겨울 끝 바람은 남풍에 밀려 사라지지만 바다는 겨울 냉기를 쉽게 벗어내지 못한다. 5월 한 달을 서서히 몸을 달구고 나서야 바다도 비로소 봄을 맞는다. 어렵게 맞이한 봄도 잠시, 태평양 멀리 장마전선이 생겨나면서 바다는 이내 궂은 모습으로 바뀐다. 해무가 수시로 피어올라 시야를 가리고 파도는 삼사일이 멀다 하고 높게 출렁인다.

 

사람은 없을 때 더 나누는 법이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니 자연히 수입이 줄고 덩달아 먹거리가 줄어든다. 모자라면 자기 손안에 더 품을 법도 하지만 바닷가 사람들은 서로 나눈다. 텃밭에 듬성듬성한 배추며 무, 아직 몸체를 키우지도 못한 어린 고추를 분지르고, 집 떠나 사는 어느 자식이 모처럼 들고 온 돼지고기 한 토막도 이웃집과 나눈다. 어려운 생활이지만 서로에게 있는 것을, 없는 이에게 나눠주며 사는 일이 함께 살아가는 근본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을이, 이웃 간이 그러한데 부모와 자식 간에야 말할 나위가 뭐 있겠는가?

 

포구 부모님 댁 가는 길에 어김없이 주말에 시장에 들렀다. 지난주에 아귀찜을 사다 드렸고 이번엔 토종닭 두 마리를 샀다. 포구에서 오십 걸음 남짓 떨어져 있는 부모님 댁. 석 달간을 바다 일을 못 하다 보니 종일 집안 생활이 대부분이다. 바다에서 나오는 찬거리가 없으니 대부분 마트에서 조달해야 한다. 하지만 워낙 돈으로 사서 먹는 일을 죄짓는 일처럼 사신 삶이니 텃밭에 무나 배추 한 포기 뽑고는 한 끼를 대신한다. 이런 생활을 알기에 부모님 댁을 찾을 때는 꼭 먹을거리 사는 일을 거르지 못한다. 주말마다 계속되는 반찬 나르기에 어머니는 되레 걱정의 말씀이시다. “굶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있는 것 가지고 차려 먹는데 왜 돈을 쓰면서 사 오느냐?” 하신다. 대답은 늘 한결같다. “큰돈 들이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 댁 오면서 뭐 제대로 사다 드시지도 않을 걸 알면서 빈손으로 옵니까?”

 

텃밭 반찬 살림은 장인댁도 예외가 아니다. 금요일 퇴근하면서 직장 근처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고 집에 들른다. 일주일 내내 두 분 만의 적적한 시간을 보냈을 생각에 찬거리를 건네고 30여 분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선다. 자식을 둔 부모님은 똑같다. 장모님은 현관문을 여는 손을 붙잡고 “이런 거 사 오지 않아도 잘 먹고 있으니 앞으로는 사 오지 마라. 부지런히 돈 모아서 이제 아들 결혼 준비도 해야 한다.” 하신다. 나의 답은 역시 똑같다.

 

하루는 아내가 이 일에 대해 말을 건넨다. 장모님이 전화했음일 터다. 말인즉슨 알아서 잘 차려 먹고 있으니 아범에게 돈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하라 했단다. 아내는 부모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이제 그만하라 했다. 나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그만한 것도 못하게 하느냐 타박하고, 아내는 그래도 부모님 말씀인데 이걸 어기는 게 오히려 더 불효 아닌가? 로 맞섰다. 한참 옥신각신 끝에 결국 한 달에 두 번만 찾아뵙기로 하고 마무리했다.

 

바다 일을 못 하게 되니 부모님의 걸음은 자연스레 과수원으로 향한다. 습한 기운이 서린 날이 많으니 온갖 병충해가 잦고 돌아서면 한 뼘 넘게 자라는 잡초들로 일이 많아지기는 했다. 세 마지기 남짓 과수원이 전부지만 그래도 게으르지 않고 찾아서 하자면 일은 늘 한정이 없다. 작년만 해도 매 주말이면 병충해 농약이며 제초제 살포, 꽃 솎기로 나를 불러대더니 올해 들어서는 뜸해졌다. 워낙 농사일에 등한시하던 탓에 이유를 찾기나 했었던가? 어느 날, 다리를 쩔뚝거리는 어머니를 보고서야 알게 됐다. 모처럼 주말에 쉬는 아들을 부르기가 미안스럽고, 잦은 비로 주말에 맞춰 농사 일정을 잡기도 어려웠던 탓에 부모님 두 분만 일하시던 이유였다.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은 내가 쉬는 날 기다려서 시키면 되지, 뭐가 그리 급하다고 편치않은 두 분이 일하시냐? 그러면서 다리 덧나서 아파하시느냐?”고 소리를 냈다. 앞으로 두 분이 따로 과수원 일 하지 마시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음은 물론이다.

 

며칠이 지나 전업으로 농사일하는 친구를 만났다. 술 한 잔을 곁들이는 자리라 사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부모님의 농사일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근심의 이야기에 친구는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했다. 부모의 자식 사랑에 대한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고, 평생을 해온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특히 나이가 들었다 하여 노동을 빼앗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한다 하여 집에만 편히 머무르게 하는 일은 절대 옳지 않다. 어렵던 시절, 오직 생존만을 위해 삶의 전체를 관통한 노동을 통제한다 함은 그분들의 삶이 통째로 없어짐과 같다. 노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은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음과 다름없다고 했다. 평생을 육체노동으로 험한 세상을 헤치고 나와 이젠 노동이 인생의 전부인 삶에 그 노동을 내놓으라 하면 그게 제일 큰 형벌이 아니겠는가? 부모를 위한다 했으나 오히려 부모를 내치고 불효를 저지르는 일과 뭐가 다르냐 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려서부터 해녀 일을 하셨던 어머니가 4년 전, 병원에서 심장 대동맥 질환 판정을 받았다. 심장 압박이 심한 잠수를 업으로 하는 해녀 일은 당장에 그만두어야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그 속상한 심정을 슬쩍 내비쳤을 뿐 그렇게 포기하셨는지 적응하셨는지 살아가시는가 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해녀 일 다시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시더니 결국은 아버지의 반대를 누르고 물질을 다니기 시작했다. 걱정된 아버지는 결국 내게 해녀 일을 막아달라는 일을 맡기셨다. 설득을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법, 마주 앉아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자 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포구에 서지 않은 날이 없으셨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앞바다를 보노라면 손에서 금가루가 줄줄이 새는 듯했다. 날이 좋으면 해녀들이 줄지어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속상했다. 아직도 잠수에 누구 못지않은 자신이 있는데, 나이로 따져도 한창인데 몹쓸 병 때문에 나가지 못함이 한스럽다. 하루 잠수에 많게는 삼 사십 만원을 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이러다 울화병에 먼저 갈 지경이라 했다. 남 마음은 모르고 그저 물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 다들 막아서니 도저히 못 살겠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할 건가?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말씀을 드리고는 자리를 떴다. “대신 수심 깊은 곳으론 절대 가지 말고, 잠수해서 숨이 다 차면 한자 눈앞에 전복이 있어도 포기하고 바로 물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잠깐 밖에 나가셨고 무뚝뚝한 아버지가 마루에 있던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묵묵한 시간이 5분쯤 지났을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준다며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옛날 어느 어촌에 아들을 둘 둔 노모가 있었다, 큰아들은 성공해서 읍내의 큰 집에 남 부러움 없이 살고 있었다, 반면 작은아들은 노모를 모시고 작은 배 한 척과 한 마지기 남짓 돌밭을 일구며 근근한 삶을 살고 있었다. 큰아들은 효심이 깊었다. 풍족히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이제 거동도 힘드시니 내가 모시겠다. 자식들 키우느라 이제 편히 사실 때도 됐으니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 노모는 큰아들을 따라갔다. 그런데 잘 사시는가 싶던 노모는 일주일을 지내지 못하고 작은아들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작은아들이 물었다. “왜 형님 집에서 잘해주시는데 편히 계시지 돌아오셨습니까?” 노모는 이야기했다. “네 형은 잠잘 때 내 등 안 긁어줘.” 노모가 원하는 삶은, 잠들기 전에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작은아들의 손이었다.

 

열 살이 채 되지도 않았던 내게, 왜 아버지는 불현듯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 오십을 훨씬 넘긴 나이다. 평생을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단 하나의 이야기다.

 

* 이 글은 중앙종합문예지 시사문단 2020년 7월호에 수필 신작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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