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기

  작은 아파트에 16년을 살았다. 지난해부터 틈틈이 난간을 확장하자는 아내의 말에 나는 대답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고 세간살이도 늘어나면서 여유 공간이 점점 좁아지긴 했다. 하지만 일 벌이는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에 애써 무시로 일관했었다. 그러던 아내가 결국 일을 저질렀다. 공사 전 세간을 정리하면서 구석구석에서 나온 물건은 어마어마했다. 잘 보관하리라 고이 정리해뒀던 물건이 10년을 넘어서야 나타났다. 필요할 때 쓰자고 잠깐 정리해뒀던 소품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모습을 드러냈다. 장롱, 책장, 침대, 싱크대 등등 수납공간은 말할 나위도 없고 틈새가 있는 곳에 어김없이 들어찬 물건들. 꺼내놓으니 거실에 반이나 들어찼다. 무얼 그리 끌어안고 살았는가 싶었다. 쓰일 데가 있다 하여 남겨두고, 버리기가 아까워 쌓아두고,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감 때문에 집 구석구석을 채워놨던 욕심의 잔재였다.
  버리는 일은 힘들었다. 유리컵은 친구 선물이라 보관해야 했다. 낡은 그림 액자는 틀과 유리만 바꿔 끼면 거실 장식으로 맞춤이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하고 몇 년 앞의 쓰임새까지 덮어씌우니 반은 남겨놓아야 했다. 아내와 나는 결심해야 했다. 10년을 없이 살아도 문제가 없었으니 결국 필요가 없었던 물건이었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그 순간의 욕심 때문에 들이는 일에만 신경 쓴 결과다. 당장 생활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버린다. 이렇게 버리기가 아까우니 앞으로는 들이는 것을 줄이자, 단순하게, 가볍게, 욕심을 버리자고 아내와 의견을 맺고서야 물건들은 집 밖으로 내쳐졌다.

 

  십여 년 전,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집안 내력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나의 생활습관에 원인이 더 크다. 입에 거친 밥을 싫어하고 늘 배불리 먹고도 움직임은 거의 없으니 집안 내력을 탓할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육류를 즐겨 먹고 술과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나이 들면서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당뇨병 경계선에서 의사의 위험경고를 받고도 먹는 습관과 운동과 담을 쌓은 생활은 그대로였다. 결국, 당뇨병 진단을 받고 약으로 병을 억눌러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약물이지만 당 수치를 떨어뜨리니 습관이 바뀔 리 없었다. 무뎌진 경계심에 먹는 양은 더 많아졌고 이것저것 가리는 것도 없어졌다. 결국, 다른 화를 부르고 말았다. LDL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면서 고지혈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덜어내고 움직여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합병증까지 올 수 있다는 의사의 심각한 경고 또한 얹어졌다.
  큰일이겠다 싶었다. 의사의 권고대로 덜어내고 줄이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밥을 덜어내고 육류 섭취를 줄여갔다. 힘든 일이었다. 평생 이어온 식습관을 바꾸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두 달 그렇게 익숙한 습관을 고쳐갔다. 적당한 운동도 곁들이는 새로운 생활이 자리 잡을 무렵 몸은 다행히 안정된 수치를 찾아갔다.

 

  성인병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단순히 보면 늘 과함에 원인이 있었다. ‘단짠’이라 불리는 단 음식과 짠 음식을 주로 하게 되면서 당뇨와 고혈압을 불러왔다. 입에 풍미를 주는 기름진 음식은 고지혈증과 지방간 등의 병을 가져다주었다. 물질이 풍족해진 현대를 맞아 생긴 병이니 현대병이라고도 한다. 마트와 시장에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온갖 곳에서 달콤한 향기와 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TV에서는 어느 채널을 막론하고 이른바 ‘먹방’이 끊임없이 송출된다. 벗어나기는 힘들고 성인병은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몸의 병을 만들고 키운다. 내 손에 움켜쥐고, 내 집에 들이는 것은 마음의 병을 키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내게 넘쳐나는데도 남이 가져갈까 봐 쌓아두어야 한다. 쌓아두었으면 지켜야 한다. 지키려면 벽을 쌓아야 하고 남이 벽에 다가오면 무기를 든다. 벽은 이웃을 가리고 무기는 더는 다가오지 말라 위협한다. 벽은 마음에 쌓였고 칼은 말에 실렸다.

 

  모든 게 넘침 속에서 일어나는 병이다. 넘치면 덜어내야 한다. 육체의 병이던 마음의 병이던 치유되는 길은 버리고 덜어내고 줄이는 일이 핵심이다. 법정 스님은 생전 무소유를 말씀하셨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 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해서 그것이 결국 스스로 삶을 옥죄어 왔다. 딱 알맞은 양이 아니라 부족함을 느낄 정도까지, 완전한 무소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덜 가지고 조금은 부족한 듯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셨다.
  예전에 사진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광각렌즈로 보는 풍경은 놀라웠다. 시야 경계를 벗어나는 풍경까지 다 담아내는 화각에 푹 빠졌다. 그걸 좋은 사진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담아낸 사진은 매번 똑같았다. 눈에 잡히는 한라산과 몇 개의 오름, 그리고 그사이에 펼쳐진 초록 들판들이 나열된 복사판일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문제는 너무 많은 걸 담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사진 입문서를 다시 읽으면 기본에 집중했다. 사진은 무엇을 많이 담느냐가 아니라 담길 시선에서 얼마나 덜어내느냐에 생명이 있다고 했다. 사진은 빛과 시간, 화각과 색, 그리고 마음의 욕심을 덜어내는 이른바 뺄셈의 미학이다. 산 하나를 덜어내고 숲을 한 뭉텅이로 들어내고 주위의 나무 몇 그루를 들어냈다. 드러난 계곡의 바위도 몇 개쯤 들어내니 송사리가 보였고 그 송사리의 지느러미는 햇빛에 반짝였다. 그새 나는 계곡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제야 꽃이 보였고 개울물 소리가 들렸고 적당한 바람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덜어내니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밖으로 내쳐졌던 물건들은 하루가 지나 집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화구세트는 이번 미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조카에게 준다는 말과 함께 들어왔고, 딸의 어릴 적 그렸던 그림과 아들이 10여 년을 써왔던 일기장은 시집, 장가갈 때 준다는 이유로 들어왔다. 뿐만 인가, 혼자 들기도 버거운 거실용 전기장판은 부모님 댁에 가야 해서 바닥에 질질 끌리며 집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버리고 덜어내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붙이는 합리화가 또 하나의 방해물인가 싶었다. 욕심을 끊음이 쉬운 일인가 싶었던 일주일이 지났다. 화구세트는 학생주인을 찾아갔고 전기장판도 아직은 차가운 부모님 집 마룻바닥에 깔렸다. 아내는 덜어내기와 버리기를 필요한 곳에 나눔으로 해결했다.

 

  “자장은 넘치고 자하는 아직 미치지 못하다 했는데 그러면 자장이 더 낫습니까?” 공자는 말씀하셨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애초부터 들이지 않고, 채우지 않을 일이다.

 

■ 이 글은 중앙종합문예지 「시사문단」 통권 205호, 2020년 5월호에 수필 신간부문에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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